(1)편에서는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의 필수 조건을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1) - https://kana.tistory.com/m/35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1)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내년 4월 입사/입학 때문에 집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찬바람이 그대로 스며드는 대부분의 일본 주택에서 많은 유학생 및 외노자 여러분이 덜덜 떨며 지내실 것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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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한 대로 (2)편에서는 내견 가서 따뜻한 집을 구별하기 위한 체크 포인트를 알아보겠다.

내견 체크 포인트

1.발바닥 첫인상 체크
2.실내 온도 체크
3.창가에 맺힌 물방울 체크
4.볼 수 있는 모든 집을 내견하기

(1)편에서 말한 1-8번 조건을 충족한다는 전제 하에, 내견의 체크 포인트는 핵심만 추리면 딱 이 네 가지로 수렴된다.

참고로 겨울에 따뜻한 집을 찾을 목적을 위해서라면 방 내견 시기, 이사 시기도 10월에서 3월까지 가을에서 겨울이 좋다. 맑은 날에 해가 잘 드는 낮 시간대에 방문하자.

1.발바닥 첫인상 체크

센스 있는 부동산들은 겨울에 내견을 하러 가면 알아서 손님용 슬리퍼를 준비해준다. 하지만 집의 단열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첫발은 슬리퍼를 신지 말고 내딛어 보자.

추운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왔을 때 발바닥에 처음으로 닿는 느낌이 냉골이라면? 당신의 발은 답을 알고 있다

[참고]바닥재의 종류도 발바닥 체감 온도에 영향을 주는데 한국의 장판에 가까운 쿠션 플로링이 가장 유리하므로 참고하자.

따뜻한 바닥재 순서
쿠션 플로링(장판) > 원목 > 일반 플로링
※9층 이상 규모 패밀리 타입 맨션은 다다미방을 없애는 추세이므로 다다미는 논외로 한다.

2.실내 온도 체크

1번과 비슷하게 실내에 들어왔을 때, 바깥보다 따뜻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운 밖에 있다가 실내에 들어오면 왠만하면 따뜻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간이 온습도계를 준비하자. 내견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방 한가운데에 놓아두자.(시계 겸용으로 나오는 것이 꽤 유용하다)
내견을 시작할 때, 마쳤을 때 온도를 사진으로 찍어두자.

대충 체감으로 일본 실내온도 평균은 바깥온도+5도 정도이다. 바깥 온도 10도일때 15도인데...유탄포니 오일히터니 코타츠가 절실한 온도이다.
내견을 마친 시점에서 바람직한 실내온도는 바깥온도+7~8도 이상이다.

3.창가에 맺힌 물방울 체크

집에서 가장 큰 창이 있는 곳을 위주로 창가의 물기를 체크하자.
하나도 없는 게 가장 좋지만 문명의 이기인 페어 유리와 이중창이 일반적이지 않은 일본에서는 바라기 어렵다.

계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하순 기준으로 물방울이 송글송글 쌀알 크기로 맺혀있다면 보통, 흥건하게 물이 흐르고 있다면 NG다. 기억하자. 창가를 흥건하게 흐르는 물의 꽃말은 방 안에서 손이 곱는 추위와 강렬한 곰팡이의 기억이다.

4.볼 수 있는 모든 집을 내견하기

같은 맨션에 깉은 타입의 방이 여러 개 나와 있다면 모조리다 내견을 하자.
시간만 허락한다면 일 없는 카도베야 1층 및 꼭대기층도 내견을 추천한다. 낀집과 번갈아 내견을 하면 흡사 지옥 입구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없다면 낀집만 내견해도 충분하다.
포인트는, 내견을 다니다 보면 같은 낀집인데도 싸늘한 집이 있고 어쩐지 따뜻한 집이 있다. 방바닥을 구석구석 밟아보면 유카당도 아닌데 어딘가에 이상하게 따뜻한 부분이 있다.

그집이 바로 빙고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찾던 무릉도원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발론이다.

바닥에 온수 배관이 지나가는 집

몇 군데 비슷한 물건들로 내견을 다니다가 발견한 진리인데, 맨션 구조마다 다르지만 온수 배관이 지나가는 라인이 있다.
이런 집은 부분 온돌 효과로 인해 별도의 난방 없이도 겨울 실내 온도 20도 전후로 유지된다.(바깥 온도 10도에도 10- 22도를 유지하는 우리집처럼!)

다만, 고려할 점은 여름이라고 배관이 차가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름에 좀더 더울 것을 각오한다면 앞뒤 볼 것 없이 계약하라고 하고 싶다.
어차피 요 10년 사이를 보면 일본의 여름은 끔찍하게 덥고 습해서 여름되는 순간부터 24시간 내내 냉방을 켜야 한다. 더운 건 에어컨으로 어떻게 되지만 추운 건 에어컨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
주의: 그렇다고 벽지가 울거나 칼로 벤 것처럼 튿어진 곳은 안 된다. 온도 변화가 큰 곳이다.


글을 마치면서

겨울철 실내 온도가 낮기로 악명 높은 일본이지만 잘 찾아보면 개중에도 좀더 따뜻한 집은 분명 있다. 비록 바닥에 온수 배관이 지나가는 만도스의 홀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시라.
(1)편에서 살펴본 조건 중 1-8을 충족하는 집이라면 그렇지 않은 집들에 비해서는 단연 따뜻하리라 장담할 수 있다.
일본에 계신 유학생 및 외노자 여러분이 추운 겨울을 버티는데 조금이라도의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겠다. 올 겨울 일본 생활도 화이팅!

집을 잘 찾으면 동장군을 무찌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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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른 궁금한 부동산 정보가 있거든 댓글로 알려주세요.
ex)치안이 좋은 집 찾기, 재해에서 안전한 집 찾기 등등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내년 4월 입사/입학 때문에 집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찬바람이 그대로 스며드는 대부분의 일본 주택에서 많은 유학생 및 외노자 여러분이 덜덜 떨며 지내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거주 공간으로서의 부동산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비교적 덜 추운 집을 찾는 법을 알려드리겠다.
TMI지만 신졸로 취활하던 시절에 부동산 회사 면접도 갔었던 사람이다. 게임 회사에 취직이 안 됐으면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을까?

바깥 온도가 10도 아래로 떨어진 추운 날이지만 난방 없이 23도


참고로 이것은 오늘 낮 재택근무 중인 우리집 방 온도이다. 이불 속 전기 장판과 가습기만 가동했을 뿐, 그 외의 난방 기구는 전혀 쓰지 않았다.
이만하면 두꺼운 털잠옷 하나 입고 슬리퍼 신으면 그럭저럭 버틸만한 온도이다.
실은 작년 겨울에 이사한 뒤로 겨울에 에어컨을 켠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나도 작년에 이사하기 전까지는 추운 집에서 덜덜 떨며 살았었다. 다음에 이사할 땐 반드시 따뜻한 집으로 갈 거라 이를 갈면서...

겨울철 일본 집의 실내 체감 온도
이것은 같은 시각 현관쪽(중문 밖) 온도는 15도. 보통 겨울철 일본 집의 실내 온도가 딱 이 정도이다(바깥 온도+5도)

*참고: 이 글은 도쿄, 싱글 여성, 1인 가구 기준의 임대 및 방문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먼저 한국적인 기준으로 겨울에 따뜻한 집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1. 남향
2. 온돌
3. 이중창
4. 베란다 샷시
5. 중문

아마도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몇 년 살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위의 당연한 조건들이 일본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

1. 남향: ○
2. 온돌: × 거의 없음
3. 이중창: ×
4. 베란다 샷시: × × ×
5. 중문: ○

온돌

작년에 집을 구할 당시 부동산 앱으로 검색해본 바로는 도쿄도내에 1인 가구용 물건 1DK/1LDK 중 온돌, 즉 유카당이 설치된 물건은 불과 100개 남짓이었다. 몇 안 되는 유카당 물건은 문의를 넣어보면 백퍼 외국인이라고 거절 당했다.

이중창

이것도 아예 없진 않은데... 1인 가구용 물건에서는 왠만하면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는 철로나 고속도로가 가까운 집에 설치되는 특수 사양이다.

베란다 샷시

어... 있는 집이 있으면 알려주시라. 일본에 온 뒤로 본 적이 없다. 나 너무 궁금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의 조건은 무엇일까? 부동산 덕후로서 15년 이상의 거주 경험과 방문 및 관찰로 추려낸 핵심 조건은 이렇다.

1. 맨션
2. SRC 철근철골 콘크리트 구조
3. 전체가 9층 이상
4. 평형이 고르게 섞인 물건(1DK부터 2LDK , 3LDK등이 섞인 곳)
5. 위 아래 양 옆이 다 있는, 사이에 낀 집 (양옆 끝집, 꼭대기층, 1층이 아닐 것)
6. 중문이 있을 것
7. 창이 적을 것, 한 군데만 있을 것(2면 채광이 아닐 것)
8. 남향
9. 실내 복도

중요도 순으로 적어보면 이렇다.

맨션

한국 기준으로 집=콘트리트로 지은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목조는 논외로 친다.
목조가 흔한 일본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늘 의문이다...

SRC 철근철골 콘크리트

한국적인 집의 기준에 부합하는 건축 구조. 일반적으로 단열과 방음, 내진에 가장 유리하다.
RC 철근 콘크리트는 SRC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단열 방음 내진 등 건물 구조의 내구도 순으로 비교하면
SRC 철근철골 콘크리트 > RC 철근 콘크리트 > 경골 콘크리트(조립식 콘크리트) >>>>>>>>>>>>>> 아파트(목조 연립) > 잇코다테(목조 단독 주택)
순이다. 기억하자.

*참고 사이트
https://www.chintai.net/news/2017/08/29/3225/

「鉄筋」と「鉄骨」ってなにが違うの? 押さえたい建物構造のポイント | CHINTAI情報局

部屋探しをしているなかで気になるのが、建物の構造。「鉄筋」と「鉄筋鉄鋼」ってなにが違うの? 「RC」「SRC」ってなんの略?

www.chintai.net

 

전체가 9층 이상

SRC는 가장 내구도가 좋은데 그만큼 건축 단가도 올라간다. 일반적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위해 9층 이상의 고층 맨션을 주로 SRC로 짓는다. 물론 간혹 예외도 있다. 예전에 살았던 집은 단4층인데도 SRC였다. 집주인이 건축 관련 사업하는 사람이라 나름의 코다와리가 있었던 거 같다.

평형이 고루 섞인 집

1R/1DK 등 단일평형 원룸만으로 구성된 콘크리트 물건 중에는 겉 프레임만 콘크리트로 짓고, 내부는 석고 보드...같은 말도 안 되는 벽으로 방을 나눠 놓는 불량 물건들이, 간혹 있다고 한다. 내견을 가서 사방 벽을 다 두드려보면 알 수도 있는데, 사실 일반인이 이걸 가리기는 어렵다. 아예 처음부터 평형이 고루 섞인 안전빵 물건으로 한정하자.
평형이 고루 섞인 패밀리 타입 맨션은 보통 입지나 치안이 좋은 곳에 세우기 때문에 환경적인 면에서도 메리트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이에 낀 집

이건 국룰이다. 맨션만이 아니라 모든 구조의 집을 통틀어서 상하좌우 낀 집이 단열에 유리하다. 특히, 빈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게 좋다. 규모의 경제를 생각하라. 위아래 양옆집에 사람이 살고 난방을 때면 절로 내 집도 어느 정도 따스해진다. (실내 온도에 영향을 주는 것은 바깥 기온만이 아니다. 옆집과 이어진 벽과 바닥 온도도 중요하다. 기억하자.)
-카도베야(끝집): 일본인들이 조용하다고 선호한다는 카도베야? 개나 줘라. 조용한 거 찾다가 얼어 죽는다. 일본에서 외벽의 꽃말은 입 돌아간다...
-꼭대기층: 여름에 옥상/지붕에 뜨거운 햇볕이 그대로 직격해서 덥고 같은 논리로 겨울에 춥다.
-1층: 습기 찬다. 찬 기운이 바로 올라와서 겨울에 춥다.
-높이와 층수가 2층 이상이어도 1층이 주차장 등으로 뻥 뚫린 곳은 안 된다. 바닥이 아이스링크다.

중문이 있을 것

보통 일본 맨션들은 왠만한 고오급형이 아닌 이상 복도식 구조가 일반적이고, 복도 샷시도 안 해서 보통 실외이기 때문에 현관문쪽에서 동장군이 쳐들어온다. 무조건 중문은 있어야 한다.

창이 적을 것, 한 군데만 있을 것(2면 채광이 아닐 것)

사이에 낀 집과도 연결 되는데, 보통 사이에 낀 집은 이면채광이기 힘들다. 사이에 낀 집이어도 이면채광이면 재검토.

창문이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고맙기만 한 존재인 건 현관문 밖 복도가 실내이고 베란다에 샷시를 해서 공기의 쿠션층이 충분하게 있고, 심지어 그 창문을 이중 삼중의 페어 유리로 짜고 그걸로 또 이중창을 시공하는 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게 일체 없는 일본 집의 창문은 해가 드는 동시에 열을 빼앗아 가는 존재이다.
창문이 많다=해가 든다=열을 빼앗긴다=추워진다
공기 쿠션층이 없다=단열이 안 된다=창문가에 결로가 생겨서 한강물이 흐른다... =곰팡이의 습격.....
이것은 동음이의어이다. 기억해야 한다.
TMI: 창문집 딸이 하는 말이니 믿으시오

남향

남향이면 물론 좋다. 그런데 남향집인데 해 잘 들고 추운 집/남향 아니고 해 잘 안드는데 따뜻한 집을 다 살아보니 남향은 의외로 겨울에 따뜻한 집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해가 잘 들면 빨래가 잘 마르고 기분이 좋고 등등 메리트가 많으므로 고를 수 있으면 당연히 남향이 좋다.

실내 복도

중문이 있을 것에서 설명했지만 고급 분양 물건 외에 임대로는 잘 없다.
의외로 아주 오래된 물건에서도 간혹 있는데... 한국의 계단식 아파트 구조를 생각하면 안 되고 복도조차 비좁아서 이사할 때 침대 같은 큰 가구 들일 수 있나? 걱정되는 물건이었다. 엘베도 없었다.

그외의 추가 사항 및 내견 가서 체크할 사항 등등은 다음에 (2)에서.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2) - https://kana.tistory.com/m/36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2)

(1)편에서는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의 필수 조건을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1) - https://kana.tistory.com/m/35 일본에서 겨울에 따뜻한 집 찾기 (1)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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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 한 달쯤 전에 언박싱했지만.

언박싱의 꽃말은 애플 제품은 개봉하기 직전이 가장 두근 거려(앱등 앱등)

iPad Air 4세대가 내 인생 최초 아이패드인 건 사실이다.

아이폰 3G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아이폰만을 써온 내가 아패에 관심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이제껏 안 샀냐면,

이패드 구매를 위한 3단계 의사 결정 과정 by 임필구(2020)

1.얄팍한 구매욕구: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써보고 싶다
2.고민: 중고와 신품 사이에서 가격과 스펙 무한 고민
3.시간 경과: 결정 못 하는 사이에 다음 세대 발표(다시 1로 돌아가기)

그렇게 어언 백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야 말았는데...
발표 때부터 꽤 평이 좋았던 아패 에어는 어쩐지 훅 지르고야 말았다. 재택 근무 기간을 견딘 나에게 주는 셀프 보상 겸 셀프 생선 겸... 뭐...
그냥 지르고 싶었다.

문서작업 하기 편할 것 같고, 어쩐지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고 게임도 하고 싶고.
그래서 질렀다. 스카이블루.
가전 제품은 일단 살 때 최고 스펙으로 사야한다는 지론에 따라 256기가로.(사소한 클릭 실수도 있었습니다..)

슼블루 256기가
또 다시 오조오억년 고민한 케이스
오 오 영롱한 슼블루
리코 내요메



그래서 아이 패드 사놓으니까 쓰나요?

결론적으로는 생각 보다 잘 쓰고 있습니다.

하루 시간대별 주 용도
-아침: 아침 먹으면서 로이터 동영상 뉴스 보기
-점심: 점심시간에 드라마/애니 보기
-퇴근후: 아이패드로 글쓰기
-주말: 스피커 연결해서 음악 듣기, 논문 보기

예상 외로 게임은 아직 하나도 안 깔았다. 이건 폰이 세상에서 잊혀진 Xs Max이나 아직 한창 현역 스펙이기도 하고, 게임은 폰으로 돌리면서 아패로 음악 깔고 딴 짓 하면 기분이가 좋크든요...
Zoom같은 온라인 회의앱을 까니까 굳이 놋북 안 켜도 돼서 좋기도 하고. 아직 본격적으로 만화를 보진 않았는데 화면이 크니까 이걸로 만화 보면 짱이겠지...? (웹툰은 폰에 최적화 되어 폰으로도 충분한데, 출판 형식 만화는 Xs Max 화면 크기로도 많이 아쉽다.)

가장 큰 변화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는 것 아닐까?

글쓰기 100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퇴근길에 키워드 생각, 전철에서 폰으로 아이클라우드에 쓰기 시작->집에 와서 아이패드로 완성시켜서 티스토리 업로드
가 루틴이 되었다.

물론 아패를 들이기 전에도 우리 집에는 데탑이 있고 일단 문서 작업 가능한 고대의 노트북이 있고 핸드폰도 있어서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글을 쓰게 되지는 않았다. 소비를 안 하고도 행동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나는 그게 안 되었기 때문에(그게 가능하신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일 벌일 때 일단 장비부터 들이고보는 전형적인 한국인 드림) 아깝지 않다. ...아아니 아주 조금은 아깝지만 -이 돈이면 냉장고를 큰 걸로 바꿀 수 있었는데- 그 무엇보다 값진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사놓은 롤리 키보드가 크기가 딱 맞아서 언뜻 보면 세트 같다

흠이 있다면 내 기준으로는 조금 무거워서 외출할 때 들고다니기에는 가방이 확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아트 직군 트친 분의 조언으로 페이퍼라이크 필름을 붙였는데 생선으로 챙긴 펜슬과 더불어 나에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지만 아이 패드의 이 하얀 화면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자꾸 아이패드를 열어 보고 싶어진다.

“혈압이 상당히…높네요. 젊은 사람에게는 무척 드문데…”
올해 내 나이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본격적으로 자조하는 것이 허락될 나이,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아직 ‘젊다’고 하는 나이.
그날을 원점으로 나의 환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달에 걸친 재택근무가 끝나갈 무렵, 머릿속이 울리는 것 같은 심한 두통이 일주일 넘게 계속되어 동네의 신경외과에 갔다. 몇가지 간단한 뇌기능 검사를 하고도 이렇다 할 원인을 알 수 없었고 혈압을 재었을 뿐이었다. 왼팔 위쪽에 두른 벨트가 팔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꽉 조인다.
액정에 표시된 숫자는 수축기 190대, 이완기 120대.
일반인인 내가 보아도 이건 높다. 꽤.
“음… 물론 오늘 처음 온 병원이라 긴장해서 높게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높아요. 가족력도 있으시고…”
나이든 남자 의사가 자그마한 수첩을 하나 건넸다.
“혈압계를 하나 사세요. 아마존에서 사천엔 정도면 살 수 있어요. 손목식이 아니라 꼭 상완식, 이렇게 팔 윗부분으로 재는 거. 그게 가장 정확해요. 이 혈압수첩에 이주 정도 아침 저녁으로 기록을 해보세요. 두통은 일단 한방약을 처방할테니 그걸 먹으며 상태를 보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실은 몇년 전부터 나쁜 예감은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건강검진에서 혈압을 잴 때 의료스태프의 의아한 눈길을 받으며 혈압을 다시 한 번 재기 시작했던 것이. 특히 작년 건강검진에서는 혈압이 높게 나와서, 고혈압이 의심되니 주의하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택 근무를 시작한 후의 불규칙한 생활.
낮시간 집중력이 떨어진 바람에 낮에는 불안하게 놀다가 새벽에 업무를 몰아서 했다. 일이 몰리는 시기에는 며칠씩 밤을 새다시피 작업을 한 시기도 있었다. 몰려서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다가 30분씩 눈을 붙였다 깨어날 때면 심장이 미친듯이 뛰곤 했다. 이러다 설마 나 죽는 건 아니겠지 생각한 적도 여러 번. 그것 때문일까? 무엇이 트리거가 되었을까? 대부분의 증상이 그렇듯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렴 어때. 당장 지금 내 혈압이 높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혈압 낮추는 법을 검색해봤다. 네이버 지식인과 의학백과의 초록색 화면을 왔다 갔다 하며 고혈압의 원인, 증상에 대한 얕은 지식을 구했다.

의사로부터 고혈압 가능성을 선고 받은 그 순간, 이거 그냥 치료하지 않고 두면 천천히 죽을 수 있겠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흔히 그러지 않는가. 고혈압은 조용한 살인자라고.
그러나 검색 결과가 자학적인 사고에 초를 쳤다. 고혈압은 심장에 부담을 준다. 그런데 심장만이 아니라 신장에도 무리가 간다고 한다.
심장은 몰라도 신장… 으…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 엄청 고통스럽다던데.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고통스럽게 살다 죽기는 싫다. 아마존에서 순순히 혈압계를 검색하기로 한다.

내 눈에는 가격만 조금씩 다를 뿐 다 그게 그거인 듯 했다. 명확히 구별되는 기능은 앱 연동 기능인데 만엔 이상. 뭐가 이렇게 비싸? 막연히 오므론이 좋을 것 같지만 그것도 근거는 없다. 이런 의료 기구를 언제 사봤어야 말이지.
나는 현대인 답게 제일 먼저 트위터에 접속하여 조언을 구했다.

-트식인 여러분 혹시 가정용 혈압계 추천해주실 분 있나요 상완식이요

손목식 혈압계를 하나 추천 받았으나, 아쉽게도 상완식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트친들은 대부분 20대에서 40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보통은 혈압 문제를 겪을 일이 없는 연령대라는 뜻이다.
그 다음은 한국에 계신 창조주에게 카톡으로 도움을 청했다.

-엄마 집에서 혈압계 뭐 써
-응/병원가서재/조절잘되고있대/^~^
(*띄어쓰기 하는 법을 모르셔서 이렇게 쓰십니다)

이럴수가…. 고혈압 환자력 4년차면서 가정용 혈압계가 없다고? 나중에 하나 보내드려야겠다.(의사가 말한 나의 가족력은 창조주이다)
고심 끝에 오므론에서 나온 제품 중 가장 저렴한 제품을 주문했다. 다행히 나를 괴롭히던 두통에는 한방약이 어느 정도 차도가 있었다. 네이버에서 혈압 낮추는 법을 검색하자 하루 3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고 본투비 귀차니스트인 내가 하루 30분 워킹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어느 정도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큰 착각이었다. 혈압계가 도착한 다음이 진짜 시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자기 전에 각 두 번씩 혈압을 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일년 반 정도 전부터 다른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반드시 매일 같은 시간이라는 제약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처럼 숨쉬기 운동만 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침 루틴, 밤 루틴이 추가되는 것이다.
게다가 병원에서 기기로 쓱 재는 것과 달리 집에서 혈압계로 혈압을 잴 때는 의외로 제약 조건이 많았다.
아침에는 반드시 식사 전일 것. 요의를 느끼는 상태가 아닐 것.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환경일 것. 등받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발을 땅에 닿게 앉을 것. 그 상태로 1~2분 휴식을 취한 후일 것. 왼팔 중간부터 위로 1~2cm지점에 벨트를 두르고 팔은 상완의 중간에 심장 위치가 오게 하는 자세로 릴랙스할 것. 재는 중에는 말을 하지 않을 것. 무슨 경국대전도 아니고….

그러나 그런 온갖 수고로움을 이기고, 놀랍게도 나는 의사가 준 이주간의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원동력은 두려움이었다. 혈압계가 가리키는 너무 높은 숫자. 좋아진 듯 하다가 다시 엄습하는, 곧잘 겪던 기압으로 인한 긴장성 두통과는 명확히 다른 종류의 둔통. 그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머릿속 혈액이 갈 곳을 잃고 흘러 넘치는 것 같았다.

이주 후, 나는 혈압수첩을 들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잘 기록하셨네요. 고혈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른 질환 때문에 고혈압이 된 경우와 명확히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질환이란, 갑상샘 항진증이나 황원병(膠原病). 40대 이상 여성에게 많은 자가면역 질환의 일종이다. 주변에 투병하는 지인이 몇 있어, 의사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그 의미를 층분히 알았다.
“결과가 이주 후에 나오니, 그 동안에는 두 종류의 고혈압에 다 쓸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약을 먹으면서 상태를 보죠.”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강압제를 처방 받았다. 약국에 들러 복약지도를 받으며 이제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고혈압 환자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좋게 생각하자.
아침 저녁으로 혈압 재는 것에 비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또 다시 이주 후.
수첩에 적힌 숫자는 오르락 내리락 하며 아주 조금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내려갔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 정상치를 조금 벗어난 수치가 몇 가지 있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의사 소견에 따르면 ‘자가면역 이상 질환 등 기타 질환의 가능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야호.
다행히 고혈압 환자일 뿐, 다른 더 무서운 병의 환자는 아니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합시다. 이 주마다 병원에 오세요. 조금씩 약 용량을 늘려갈 겁니다. 지금 시기에 시작하면 아마 가을 쯤에는 정상 범위 내로 돌아올 수 있을 겠네요. 아, 소금 섭취는 가급적 줄이시고…”
야호. 내 병은 어쩌면 완치가 가능하다.
야호. 더더군다나 흔한 병이기에 약값도 무척 싸다. 이주치에 560엔 정도.

야호할 일은 사실 훨씬 많다. 우연히 두통 잘 보는 병원을 검색했더니 동네에 우연하게도 뇌신경외과와 고혈압 전문의를 가진 의사가 있는 의원이 도보 10분 거리에 있을 확률을 구하시오.
야호(삼창).

물론 앞으로의 치료 과정은 이제껏 겪은 것처럼 순탄치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
나는 고혈압 환자가 되고 나서 그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세상을 본다. 새로운 삶을 산다.
그것은 아침 저녁으로 약 10분의 번거로운 루틴이 추가된 삶의 방식이다. 이주마다 병원에 통원하고 휴약 기간도 없이 매일 꾸준히 약을 먹는 삶이다. 자유롭게 고르던 식료품 중에서 조용히 염분이 많은 식품과 그레이프 후르츠를 제외하는 삶이다.(약제가 혈관에 오래 머무르게 해서 강압제 약효가 과해질 위험이 있다.) 날씨를 보고 워킹을 할 수 있는지 체크한다. 날이 맑으면 회사에 다녀온 후에, 혹은 퇴근길에 워킹을 갈 수 있게 스케줄을 조정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갑자기 찾아온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전인류가 모두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 중이다. 내 것이 조금(?) 더 특별 에디션일뿐. 약간 나쁜 소식이라면 코비드-19 바이러스는 혈관계 기저 질환자에게 더 치명적이라고 한다.
어쩔 수 있나. 평범한 회사원인 나라는 개인은 어차피 코로나의 위험을 컨트롤 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혈압이라면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다.

미리 맞는 매가 낫다는 말이 있다.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모두 노인이 될 것이고 지금은 상상도 하기 싫은 온갖 노환에도 시달리게 될 것이다. 남들 다 맞는 매를 나는 조금 더 일찍 맞는다고 생각하자.
백세 시대인 지금 아주 먼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희망컨대 잠시, 어쩌면 조금 오래 겪을 환자 생활을 최대한 슬기롭게 보내려고 한다. 가능한 선에서 말이다.

땡! 이 일러스트는 틀렸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왼팔로 잽니다.


*올해 7월에 여성 모임에서 썼던 글을 발굴하여 올립니다.
생각해보면 글쓰기 프로젝트 100을 하는데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도쿄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오늘만 600명 넘게 나왔다. 그러나 도쿄의 영화관들은 거리 두기 없이 영업을 지속 중이다. 작년부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일명 불초상)이 개봉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르 시네마는 입장 전에 열 감지기가 있어서 방역은 꽤 충실한 편.
일본의 영화 시장은 유명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전세계에서 가장 늦게 개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반대로 저예산 예술 영화는 한국 보다 더 잘(?) 개봉하는 편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와 예술 영화를 둘 다 좋아하는 극단적인 영화 취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이점이 있어서 다행이다.
(불초상의 일본 개봉이 유독 늦은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다.)

시부야 분카무라 르 시네마에 설치된 불초상 코너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영화를 보기 전이라 의미를 1도 몰랐다고 합니다
불초상 잘알이 세팅한 포토 스팟


영화를 보러 갈 때는 아무런 스포 없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도 여성 감독,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라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보러 갔다. 다양한 종류의 포스터를 보고서 겨우 시대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다.

이하,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기록용 감상.

영화가 시작되고 빈 스크린 같은 흰 화면에 초크로 선이 한 두개씩 그어진다.

제목에 들어간 “초상”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인공의 직업이 화가라는 데서 관련성을 알게된다. 주인공은 화가이고, 아틀리에에서 그림 모델과 선생을 겸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렸다.

다음 장면은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흔들리는 조각배에서 이리저리 큰 짐을 지키는 여인. 이 장면은 저절로 피아노(1993)를 연상하게 했다. 소중한 짐이 바다로 빠지자,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까지 똑같다.(지금 생각해보니 오마주인 듯도 하다. 참고로 피아노에서는 클라이맥스 장면.)

높은 절벽에 위치한 저택. 나이 어린 하녀가 맞아 준다.
오래 사용되지 않은 응접실. 흰 천으로 덮힌 가구들과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아가씨의 혼담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불려간 주인공은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캐묻는다. 하지만 하녀도 잘 모른다. 수녀원에서 지내던 아가씨가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가씨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결혼을 거부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해서, 마치 스페어 타이어처럼 불려온 아가씨. 지참금을 줄이기 위해 딸들을 수도원에 처넣는 것이 흔한 일인 이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어머니 본인도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시골로 시집을 왔을텐데...

죽은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가씨는 초상화 모델을 거부한다. 주인공에게 떨어진 미션은, 말동무로 가장해서 같이 산책을 나가는 잠깐의 시간에 얼굴을 기억해 초상화를 완성할 것.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이 언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는지 논란이 있다고 해서 놀랐다. 첫만남부터 주인공의 시선은 온통 아가씨에게 가 있다. 사랑이 아니면, 누가 처음 본 사람의 귓구멍을 찬양하고 귀연골에서 따뜻한 색을 연상한단 말인가...? 좋은 집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다소 투박한 손마저도.(수도원에서 자란 설정을 생각하면 고증이 끝내줘요)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기준으로는 주인공이 훨씬 미인이라서(로세티의 그림에서 이런 얼굴 봤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시선으로 설득 당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도원에서 자라 장송곡 외의 음악을 모른다고 하는 엘로이즈에게 조율이 안 된 피아노로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주면서 엘로이즈는 마음을 연다. 하지만 처음 완성한 초상화는 마치 인스타그램의 사진처럼 영혼이 없는 미소를 띤 모습으로 그려진다. 엘로이즈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영혼 없는 모습으로 그린 초상화 때문에 더 화를 내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외출한 일주일 남짓의 시간.
저택에 남겨진 아가씨와 화가, 어린 하녀. 여자 셋이 보내는 온전한 시간은 눈물이 날만큼 평화롭다.
군림하는 가부장 대리(어머니)가 없는 동안, 사자가 없는 초원에서 영양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여자들은 한없이 자유롭다. 사용인들의 주방에서 화가는 와인을 마시고, 아가씨는 익숙한 듯 음식을 하고, 어린 하녀는 끊임없이 수를 놓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중절을 위해 연대하고, 다같이 마을 축제에 간다. 이 때 아가씨의 발치에 불이 붙는데 -불초상의 불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님- 우아한 은유라고 하겠다. 둘의 사랑은 불이 붙은 것처럼 번지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6일 안에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데, 초상화를 완성시키면 아가씨는 밀라노로 시집을 가게 된다.


파국이 예정된 것을 알면서 지독하게 짧은 기간 한정의 사랑을 하시겠습니까? (Y/N)


오르페우스의 비극을 낭독하면서 엘로이즈는 눈물 겨운 사랑이라고 하고, 하녀는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하고, 주인공은 예술가로서의 선택이라고 한다.
다른 반응은 사랑 속에서 충만한 엘로이즈와 예정된 미래를 미리 슬퍼하는 주인공의 태도와도 겹쳐진다.
처음으로 엘로이즈는 진짜로 죽기 위해 바닷가로 간다. 다가올 미래는 바꿀 수도 막을 수도 없지만, 사랑을 후회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생각해보면 사랑을 통해 점차 적극적으로 변한 엘로이즈와 달리, 주인공 마리안느는 처음부터 회피적이었다. 마치 자칫 사랑에 빠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서야, 자신 안의 사랑을 인정하고 나서야, 겨우 아가씨의 영혼의 향기가 깃든 초상화가 완성된다.
결혼식 예복을 입은 연인을 포옹하고 떠나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아니, 아가씨의 요구는 잔혹하다. 뒤를 돌아봐. 나를 봐. 당신은 마지막에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처럼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살아.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갤러리에서 발견한 초상화 속 엘로이즈는 아름다운 아들과 함께 행복해보이는 영혼 없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손에는 둘의 사랑의 징표인 책 28페이지가 보이게 들고 있다.(이것을 귀족 남편의 요구로 그렸을 초상화가는 귀족 부인의 별난 요구라고 생각했겠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니 장황해졌는데 잊어도 될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라서 그렇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정말이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불시착 보다 훨씬 가슴이 벅찼다. 2020 최고의 영화.


불초상을 보며 생각난 영화들.

피아노(1993) 여성 감독 영화. 일본 제목:ピアノレッスン
페어웰, 마이 퀸(2013) 일본 제목: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に別れをつげて

(사진은 IMDB에서 가져옴)
-피아노: 피아노를 치는 것 외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 주인공. 영국의 그럭저럭 사는 집 딸이었으나 혼전 임신 때문에 식민지인 뉴질랜드의 성불능자 남편에게 신부로 팔려간다. 아름다운 테마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의 제목이 주제를 관통하는 것처럼 여성의 욕망에 관한 영화.
-페어웰, 마이 퀸: 40대인 마리 앙트와네트를 짝사랑하는 책 읽어주는 시녀(레아 세두). 하지만 앙트와네트에게는 이미 폴리냑 백작부인이라는 오랜 연인이 있는데... 가슴 아리는 첫사랑, 소녀의 성장 서사.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는 내 오랜 취미였고 한 때는 주요 생업이기도 했다.
어느 날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그후로 꽤 오랫동안 글을 거의 안 쓰고 살았다. 그러고도 그냥 살아졌다. 지금도 어찌 어찌 살아질 것 같다.

게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여름 이벤트가 지나가고 1주년이 찾아오고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오고 신년 이벤트가 또 오고 금방 또 분기가 지나가고 평가 면담이니 피드백 면담이니 하는 인사평가 시기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았다. 입버릇처럼 영어 공부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연휴가 찾아 올 때마다 콘마리의 인생이 두근거리는 방정리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행을 하지는 못 하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결코 읽지 않으면서.

인생 처음으로 아이패드를 구매하여 유용하게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표면적인 계기이다. 근원적으로는 팬데믹-재택 근무 기간에 찾아온 체력 저하와 건강 악화가 있다.
유전의 축복인지 환경의 축복인지 살면서 공부 머리 일 머리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지병(이라기에는 진짜 투병하시는 분들에 비해 아주 사소하지만)을 얻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으로 내 삶을 강제로 너프시켰다.

체력이 달려 일을 예전과 같은 속도와 공수로 소화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육체적인 한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체력은 조금씩 떨어지니까. 다시 꾸준히 관리하면 조금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순진하게도 나는, 사람의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니 좋은 기억들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았다. 어디 어린 시절 뿐인가. 불과 최근 몇 년 사이의 일들조차, 뛸듯이 기뻤던 일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그저 희미할 뿐이다. (쓰고 보니 늙은 작가가 마지막 작품 후기에 쓸 것 같은 문구라서 스스로 잠깐 자아비판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글쓰기 100프로젝트는 매일 쓰고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 끝까지 쓰여진 문장을 굳이 지우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 것은 언제던가? 희열에 가슴이 벅찼던 적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적은?

바꿔 말하자면 지금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인생이 희미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썼지만 겨울철 안경에 김서림 방지제를 뿌리는 것과 본질은 비슷하다.
인생의 김서림 방지를 위해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안경의 김서림

본가에 살던 시절, 우리집 헤어 드라이어는 언제나 헌 것이었다. 고물상 기질이 있는 부친이 어디선가 주워온 것을 고쳐서 쓰다가 고장 나면 다시 고쳐서 썼다. 운명을 다한 경우에는 어디선가 마법처럼 또 다음 대 헌 헤어 드라이어가 등장하곤 했다. (헤어 드라이어만이 아니다. 손재주가 너무 좋은 사람이 있어도 가족들이 고생합니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은근히 그게 불만이었다. 헌 것이기에 당연히 사용감이 있고, 가끔은 케이블에서 알 수 없는 검댕이 묻어나기도 했다. 접촉 불량이 일어난 것을 절연 테이프로 감거나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첫 유학을 통해 본가에서 독립하면서 처음으로 양판점에 가서 헤어 드라이어를 골랐다. 막연히 나만의, 그것도 새 헤어 드라이어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던 것 같다.
첫 유학, 일본 여행 및 두 번째 유학을 거치면서 세월이 무상하게 흐르고 1대 드라이어는 어느 날 운명을 다했다. 대충 한 8년은 쓴 것 같다. 원래 물건을 한 번 사면 두고 두고 잘 쓰는 타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물건에 또 쉽게 질린다.
새 것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별 생각없이 아마존 판매 랭킹 1위를 2대로 들였는데 이건 잘못된 만남이었다. 성능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다만 1대와 크게 성능 차이가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초강풍이라는 선전 문구와 달리, 풍량은 미용실의 그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뜻이다. 쓸데없이 풍성한 내 머리를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근래의 내 머리는 탈색과 염색을 거쳐 더욱 말리는데 시간이 드는 모질이 되어 있었다.
(강산이 바뀔만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게 웬말인가. 제품 개발 똑바로 안 하냐. 헤어 드라이어 제조 업계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찬스는 작년 골든 위크에 찾아왔다. 다이슨이 어머니날 세일(일본은 구미권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날을 챙긴다)을 한다는데 별 수 있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눈 딱 감고 질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https://twitter.com/lim_pil_gu/status/1129230088782852096?s=12

필구, 임필구@스크립트 깎는 노인 on Twitter

“2주 정도 다이슨 드라이어 사용해본 소감. 1.내 컨디션: 베테랑 미용사조차 당연히 웨이브 펌 언제 했냐고 묻는 천연 곱슬, 머리숱 많음, 세미롱 아래 절반은 탈색 경험(=모질 최악), 타고난 곰

twitter.com


신세계. 브라보.
신문물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이슨에 뭐 받은 거 아닙니다. 제 돈으로 샀습니다.)

헤어 드라이어 계의 신기원을 연 다이슨 슈퍼 소닉(2020)

피곤에 찌든 날, 집에 와서 겨우 겨우 샤워를 하고 나와 노곤해진 몸으로 머리를 말리기가 힘들어서 울 것 같았던 나날들, 이제까지의 고생은 뭐였을까...? 특히 나처럼 머리숱 많은데다 타고난 곰손(아무리 머리를 말려도 머리가 안 마르는)에게는 필수 아이템인데 이 좋은 걸 몰랐다니 인생 헛살았어...

기승전 지름으로 끝나는 것 같은데, 오늘의 교훈은 가전 제품을 고를 때는 신중히, 하지만 지를 때는 과감하게.
세일이 아니면 어때요. 효용이 충분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래야 하루 먼저 쓰지. 자주 쓰는 제품은 무조건 빨리 사야 이득입니다.
이제는 여행 갈 때도 다이슨 헤어 드라이어를 모시고 가는 필구였습니다.

*글쓰기 100 프로젝트는 글감의 다양성을 담보하기 위해 하루는 옛날 일을, 하루는 요새 일을 주로 적기로 했습니다. 어제 막 그렇게 정했습니다. 당분간은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본어에 아마노쟈쿠(天邪鬼)라는 단어가 있다. 단적으로 번역하면 청개구리. 이러라고 하면 굳이 굳이 꼭 저러는 사람이다. 남들이 바람풍하면 일부러라도 바담풍을 하는 사람이다. 타고난 뇌구조가 달라서일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특정 성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까? 원인은 모르지만 아무튼간에, 겉으로는 부모님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속으로는 그 반대를 가는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노는 아이가 그럴리 없다는 대한민국 선생님들의 흔한 편견을 이용해서 몰래 손톱을 기르고 귀를 n개 뚫기도 했다.(당시 JRock에 심취한 왜색이 짙은 중학생이었습니다...)

태초에 반발이 있었다. 그리고 반발은 힘이 된다.
생각해보면 관성적으로 수행해온 일들 중 그 첫 시작은 반발이었던 경우가 종종 있다.
트위터 계정에서 몇 번 고백한 적이 있는데 꽤 오랜 기간 나는 노다메와 같은 이유로 원피스 팡인이었다. 한 장만 입으면 위 아래 코디 끝, 액세서리도 필요 없고, 코디하기 편하고, 쓱 입기 편하고, 빨리 마르고...
예상치 못한 것은 팬데믹 시대에 장기 재택 근무를 하면서 찾아온 건강 악화였다. 맨다리가 시리다는 감각을 알게 된 나는 자동으로 원피스 팡인을 졸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옷장 안에는 지금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온갖 종류의 원피스로 가득하다. 결혼식용 포멀 원피스, 입고 가면 옷가게 점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드레시한 좌우 비대칭 어시메트리 원피스, 캐주얼과 포멀 사이의 면접 원피스, 하늘하늘 잠자리 날개 같은 여름 원피스, 귀인에게 나눔 받은 스포티한 데님 원피스, 그 외에도 아무튼, 원피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치마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활동적인 놀이도 좋아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딱히 원피스만 즐겨입지는 않았다. 나는 무엇을 계기로 이렇게 원피스 팡인이 되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태초의 반발을 낳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장래희망을 발표하고 난 순간이었다. 장래 대통령이 되어 우리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맹랑한 발표는 조금 과장을 보태 담임 선생님의 폭풍 칭찬과 베이비부머 어린이들로 가득한 교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후로 나의 장래희망은 열 두 번도 더 바뀌었지만(대통령->만화가->캐릭터 디자이너...),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 훈훈한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문제적 순간은 그 다음이었다. 자신감을 만땅으로 충전하고 단상을 내려올 때, 맨 앞자리에 앉은 여자 어린이 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쟤는 맨날 바지만 입어.” “치마 입고 온 적 한 번도 없을 걸?”
딱히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한 마디는 내 가슴 속에 송곳처럼 콕 박혀 있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날의 기억은 무척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홉살 어린이가 아니고, 성장했고,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모친이 나를 낳으셨을 때 나이 보다 내가 연상이다.
시작이 반발이라면, 이제는 졸업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저)반발의 힘

대 팬데믹 시대를 맞아 마스크가 일용품이 되면서 화장을 그만둬봤다. 머리색이 거의 늘 밝은 색이라 눈썹을 안 그릴 수는 없어서 엄밀하게는 피부 화장을. 피부 화장이라고 해봤자 자외선차단제 겸용 메이컵 베이스를 바른 뒤 쿠션 퍼프 오분 컷으로 끝내던 것이라 딱히 극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는 일은 없었다. 눈이 극도로 예민해서 눈화장은 원래 안 한다. 이쯤되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원래도 화장을 거의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의 안 하던 화장을 한 단계 더 안 하게 되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제까지 했던 화장은 대체 무얼 위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화장을 그리 즐기지 않는데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한 풀메이크업을 위해 파운데이션이니 컨실러이니 하는 풀메이크업 전용 아이템들을 한 세트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거의 쓰지도 않으면서 분야별 잇템들(베네피트 치크라든지 샌텔라 드레싱 파우더라든지)을 원했고 기회가 되면 소유했다. 절대 쓸 일이 없는 과감한 색의 브랜드 립스틱도 어쩐지 특이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바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원했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와 같은 이름의 립스틱 시리즈도 있었다. 오직 감성적인 소비를 위해 굿즈로서 구매한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용품으로 구입한 화장품을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한데도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는...사실 전혀 없다.
그럼 언제부터 화장을 시작했나?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시작했다. 취직을 한 이후로는 얼마간 관성적으로 화장을 해온 셈이다.
적폐가 따로 없다. 자리만 차지하고.

물론 화장을 안 한다는 선택이 가능한 것은 내가 비교적 프리한 업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면 응대나 거래처와의 미팅을 하는 업무 담당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다.(하기 싫어도 화장 여부를 선택할 수 없는 분들을 존중한다. 또한 즐거움을 위해, 또는 관습적으로 화장을 한다는 분들의 선택 또한 존중한다. 실천하는 운동으로서 화장을 배격하는 분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서 없는 글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비포 애프터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비포: 그래도 화장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어느 날. 늦잠을 자서 눈썹을 못 그리고 간 날이 있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자마자 누가 내 얼굴을 볼새라 회사 아래 드럭스토어로 뛰어 가서 아이브로우를 사와 화장실에서 눈썹을 그리고 미션을 완수한듯이 뿌듯해했다.
-애프터: 얼마전에 아침에 정신이 나갔는지 눈썹을 한쪽만 그리고 갔다. 오전 업무가 끝날 즈음, 화장실에서 짝눈썹을 알아챈 나는 주저없이 손가락으로 눈썹을 쓱쓱 지워냈다. 거 아예 안 그리면 짝짝이는 아니잖아.

아예 안 그리면 짝눈의 위기는 회피 가능

가장 처음 의식적으로 외운 일본어는 이 단어일 것이다. (사람 이름이지만 뭐 어떤가)익숙하지 않은 음절이 잘 안 외워져서 몇 번이고 입속으로 되뇌어가며 외웠다.

초등학교 중~고학년이 될까 말까한 부스러기 시절, 드래곤볼의 세계에 흠뻑 매료된 나는 문득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그날 그런 대화를 하게 되었는지 계기는 잊어버렸다. 어느날 나는 부친에게 진지하게 도리야마 아키라가 얼마나 대단한 만화가인지 드래곤볼이 얼마나 명작인지 얼마나 세계적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나는 도리야마 아키라처럼 성공한 만화가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어린 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부친은 당시 여느 어른들과는 사뭇 다르게 반응했다.
“그래. 너는 만화가가 되고 싶구나. 그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가가 되어라.” 그 말투는 진지했고 어딘지 뿌듯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전혀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그날 저녁 상자리에서 모친에게“○○가 장래 유명한 만화가가 되겠다네” 라 부친이 자랑 아닌 자랑을 하던 순간을 나는 오래 기억한다.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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