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는 내 오랜 취미였고 한 때는 주요 생업이기도 했다.
어느 날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그후로 꽤 오랫동안 글을 거의 안 쓰고 살았다. 그러고도 그냥 살아졌다. 지금도 어찌 어찌 살아질 것 같다.

게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여름 이벤트가 지나가고 1주년이 찾아오고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오고 신년 이벤트가 또 오고 금방 또 분기가 지나가고 평가 면담이니 피드백 면담이니 하는 인사평가 시기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았다. 입버릇처럼 영어 공부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연휴가 찾아 올 때마다 콘마리의 인생이 두근거리는 방정리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행을 하지는 못 하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결코 읽지 않으면서.

인생 처음으로 아이패드를 구매하여 유용하게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표면적인 계기이다. 근원적으로는 팬데믹-재택 근무 기간에 찾아온 체력 저하와 건강 악화가 있다.
유전의 축복인지 환경의 축복인지 살면서 공부 머리 일 머리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지병(이라기에는 진짜 투병하시는 분들에 비해 아주 사소하지만)을 얻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으로 내 삶을 강제로 너프시켰다.

체력이 달려 일을 예전과 같은 속도와 공수로 소화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육체적인 한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체력은 조금씩 떨어지니까. 다시 꾸준히 관리하면 조금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순진하게도 나는, 사람의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니 좋은 기억들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았다. 어디 어린 시절 뿐인가. 불과 최근 몇 년 사이의 일들조차, 뛸듯이 기뻤던 일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그저 희미할 뿐이다. (쓰고 보니 늙은 작가가 마지막 작품 후기에 쓸 것 같은 문구라서 스스로 잠깐 자아비판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글쓰기 100프로젝트는 매일 쓰고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 끝까지 쓰여진 문장을 굳이 지우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 것은 언제던가? 희열에 가슴이 벅찼던 적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적은?

바꿔 말하자면 지금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인생이 희미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썼지만 겨울철 안경에 김서림 방지제를 뿌리는 것과 본질은 비슷하다.
인생의 김서림 방지를 위해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안경의 김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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