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살던 시절, 우리집 헤어 드라이어는 언제나 헌 것이었다. 고물상 기질이 있는 부친이 어디선가 주워온 것을 고쳐서 쓰다가 고장 나면 다시 고쳐서 썼다. 운명을 다한 경우에는 어디선가 마법처럼 또 다음 대 헌 헤어 드라이어가 등장하곤 했다. (헤어 드라이어만이 아니다. 손재주가 너무 좋은 사람이 있어도 가족들이 고생합니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은근히 그게 불만이었다. 헌 것이기에 당연히 사용감이 있고, 가끔은 케이블에서 알 수 없는 검댕이 묻어나기도 했다. 접촉 불량이 일어난 것을 절연 테이프로 감거나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첫 유학을 통해 본가에서 독립하면서 처음으로 양판점에 가서 헤어 드라이어를 골랐다. 막연히 나만의, 그것도 새 헤어 드라이어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던 것 같다.
첫 유학, 일본 여행 및 두 번째 유학을 거치면서 세월이 무상하게 흐르고 1대 드라이어는 어느 날 운명을 다했다. 대충 한 8년은 쓴 것 같다. 원래 물건을 한 번 사면 두고 두고 잘 쓰는 타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물건에 또 쉽게 질린다.
새 것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별 생각없이 아마존 판매 랭킹 1위를 2대로 들였는데 이건 잘못된 만남이었다. 성능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다만 1대와 크게 성능 차이가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초강풍이라는 선전 문구와 달리, 풍량은 미용실의 그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뜻이다. 쓸데없이 풍성한 내 머리를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근래의 내 머리는 탈색과 염색을 거쳐 더욱 말리는데 시간이 드는 모질이 되어 있었다.
(강산이 바뀔만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게 웬말인가. 제품 개발 똑바로 안 하냐. 헤어 드라이어 제조 업계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찬스는 작년 골든 위크에 찾아왔다. 다이슨이 어머니날 세일(일본은 구미권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날을 챙긴다)을 한다는데 별 수 있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눈 딱 감고 질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https://twitter.com/lim_pil_gu/status/1129230088782852096?s=12

필구, 임필구@스크립트 깎는 노인 on Twitter

“2주 정도 다이슨 드라이어 사용해본 소감. 1.내 컨디션: 베테랑 미용사조차 당연히 웨이브 펌 언제 했냐고 묻는 천연 곱슬, 머리숱 많음, 세미롱 아래 절반은 탈색 경험(=모질 최악), 타고난 곰

twitter.com


신세계. 브라보.
신문물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이슨에 뭐 받은 거 아닙니다. 제 돈으로 샀습니다.)

헤어 드라이어 계의 신기원을 연 다이슨 슈퍼 소닉(2020)

피곤에 찌든 날, 집에 와서 겨우 겨우 샤워를 하고 나와 노곤해진 몸으로 머리를 말리기가 힘들어서 울 것 같았던 나날들, 이제까지의 고생은 뭐였을까...? 특히 나처럼 머리숱 많은데다 타고난 곰손(아무리 머리를 말려도 머리가 안 마르는)에게는 필수 아이템인데 이 좋은 걸 몰랐다니 인생 헛살았어...

기승전 지름으로 끝나는 것 같은데, 오늘의 교훈은 가전 제품을 고를 때는 신중히, 하지만 지를 때는 과감하게.
세일이 아니면 어때요. 효용이 충분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래야 하루 먼저 쓰지. 자주 쓰는 제품은 무조건 빨리 사야 이득입니다.
이제는 여행 갈 때도 다이슨 헤어 드라이어를 모시고 가는 필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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