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팬데믹 시대를 맞아 마스크가 일용품이 되면서 화장을 그만둬봤다. 머리색이 거의 늘 밝은 색이라 눈썹을 안 그릴 수는 없어서 엄밀하게는 피부 화장을. 피부 화장이라고 해봤자 자외선차단제 겸용 메이컵 베이스를 바른 뒤 쿠션 퍼프 오분 컷으로 끝내던 것이라 딱히 극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는 일은 없었다. 눈이 극도로 예민해서 눈화장은 원래 안 한다. 이쯤되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원래도 화장을 거의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의 안 하던 화장을 한 단계 더 안 하게 되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제까지 했던 화장은 대체 무얼 위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화장을 그리 즐기지 않는데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한 풀메이크업을 위해 파운데이션이니 컨실러이니 하는 풀메이크업 전용 아이템들을 한 세트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거의 쓰지도 않으면서 분야별 잇템들(베네피트 치크라든지 샌텔라 드레싱 파우더라든지)을 원했고 기회가 되면 소유했다. 절대 쓸 일이 없는 과감한 색의 브랜드 립스틱도 어쩐지 특이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바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원했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와 같은 이름의 립스틱 시리즈도 있었다. 오직 감성적인 소비를 위해 굿즈로서 구매한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용품으로 구입한 화장품을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한데도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는...사실 전혀 없다.
그럼 언제부터 화장을 시작했나?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시작했다. 취직을 한 이후로는 얼마간 관성적으로 화장을 해온 셈이다.
적폐가 따로 없다. 자리만 차지하고.

물론 화장을 안 한다는 선택이 가능한 것은 내가 비교적 프리한 업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면 응대나 거래처와의 미팅을 하는 업무 담당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다.(하기 싫어도 화장 여부를 선택할 수 없는 분들을 존중한다. 또한 즐거움을 위해, 또는 관습적으로 화장을 한다는 분들의 선택 또한 존중한다. 실천하는 운동으로서 화장을 배격하는 분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서 없는 글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비포 애프터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비포: 그래도 화장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어느 날. 늦잠을 자서 눈썹을 못 그리고 간 날이 있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자마자 누가 내 얼굴을 볼새라 회사 아래 드럭스토어로 뛰어 가서 아이브로우를 사와 화장실에서 눈썹을 그리고 미션을 완수한듯이 뿌듯해했다.
-애프터: 얼마전에 아침에 정신이 나갔는지 눈썹을 한쪽만 그리고 갔다. 오전 업무가 끝날 즈음, 화장실에서 짝눈썹을 알아챈 나는 주저없이 손가락으로 눈썹을 쓱쓱 지워냈다. 거 아예 안 그리면 짝짝이는 아니잖아.

아예 안 그리면 짝눈의 위기는 회피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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