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오늘만 600명 넘게 나왔다. 그러나 도쿄의 영화관들은 거리 두기 없이 영업을 지속 중이다. 작년부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일명 불초상)이 개봉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르 시네마는 입장 전에 열 감지기가 있어서 방역은 꽤 충실한 편.
일본의 영화 시장은 유명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전세계에서 가장 늦게 개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반대로 저예산 예술 영화는 한국 보다 더 잘(?) 개봉하는 편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와 예술 영화를 둘 다 좋아하는 극단적인 영화 취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이점이 있어서 다행이다.
(불초상의 일본 개봉이 유독 늦은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다.)

시부야 분카무라 르 시네마에 설치된 불초상 코너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영화를 보기 전이라 의미를 1도 몰랐다고 합니다
불초상 잘알이 세팅한 포토 스팟


영화를 보러 갈 때는 아무런 스포 없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도 여성 감독,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라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보러 갔다. 다양한 종류의 포스터를 보고서 겨우 시대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다.

이하,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기록용 감상.

영화가 시작되고 빈 스크린 같은 흰 화면에 초크로 선이 한 두개씩 그어진다.

제목에 들어간 “초상”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인공의 직업이 화가라는 데서 관련성을 알게된다. 주인공은 화가이고, 아틀리에에서 그림 모델과 선생을 겸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렸다.

다음 장면은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흔들리는 조각배에서 이리저리 큰 짐을 지키는 여인. 이 장면은 저절로 피아노(1993)를 연상하게 했다. 소중한 짐이 바다로 빠지자,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까지 똑같다.(지금 생각해보니 오마주인 듯도 하다. 참고로 피아노에서는 클라이맥스 장면.)

높은 절벽에 위치한 저택. 나이 어린 하녀가 맞아 준다.
오래 사용되지 않은 응접실. 흰 천으로 덮힌 가구들과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아가씨의 혼담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불려간 주인공은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캐묻는다. 하지만 하녀도 잘 모른다. 수녀원에서 지내던 아가씨가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가씨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결혼을 거부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해서, 마치 스페어 타이어처럼 불려온 아가씨. 지참금을 줄이기 위해 딸들을 수도원에 처넣는 것이 흔한 일인 이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어머니 본인도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시골로 시집을 왔을텐데...

죽은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가씨는 초상화 모델을 거부한다. 주인공에게 떨어진 미션은, 말동무로 가장해서 같이 산책을 나가는 잠깐의 시간에 얼굴을 기억해 초상화를 완성할 것.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이 언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는지 논란이 있다고 해서 놀랐다. 첫만남부터 주인공의 시선은 온통 아가씨에게 가 있다. 사랑이 아니면, 누가 처음 본 사람의 귓구멍을 찬양하고 귀연골에서 따뜻한 색을 연상한단 말인가...? 좋은 집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다소 투박한 손마저도.(수도원에서 자란 설정을 생각하면 고증이 끝내줘요)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기준으로는 주인공이 훨씬 미인이라서(로세티의 그림에서 이런 얼굴 봤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시선으로 설득 당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도원에서 자라 장송곡 외의 음악을 모른다고 하는 엘로이즈에게 조율이 안 된 피아노로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주면서 엘로이즈는 마음을 연다. 하지만 처음 완성한 초상화는 마치 인스타그램의 사진처럼 영혼이 없는 미소를 띤 모습으로 그려진다. 엘로이즈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영혼 없는 모습으로 그린 초상화 때문에 더 화를 내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외출한 일주일 남짓의 시간.
저택에 남겨진 아가씨와 화가, 어린 하녀. 여자 셋이 보내는 온전한 시간은 눈물이 날만큼 평화롭다.
군림하는 가부장 대리(어머니)가 없는 동안, 사자가 없는 초원에서 영양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여자들은 한없이 자유롭다. 사용인들의 주방에서 화가는 와인을 마시고, 아가씨는 익숙한 듯 음식을 하고, 어린 하녀는 끊임없이 수를 놓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중절을 위해 연대하고, 다같이 마을 축제에 간다. 이 때 아가씨의 발치에 불이 붙는데 -불초상의 불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님- 우아한 은유라고 하겠다. 둘의 사랑은 불이 붙은 것처럼 번지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6일 안에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데, 초상화를 완성시키면 아가씨는 밀라노로 시집을 가게 된다.


파국이 예정된 것을 알면서 지독하게 짧은 기간 한정의 사랑을 하시겠습니까? (Y/N)


오르페우스의 비극을 낭독하면서 엘로이즈는 눈물 겨운 사랑이라고 하고, 하녀는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하고, 주인공은 예술가로서의 선택이라고 한다.
다른 반응은 사랑 속에서 충만한 엘로이즈와 예정된 미래를 미리 슬퍼하는 주인공의 태도와도 겹쳐진다.
처음으로 엘로이즈는 진짜로 죽기 위해 바닷가로 간다. 다가올 미래는 바꿀 수도 막을 수도 없지만, 사랑을 후회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생각해보면 사랑을 통해 점차 적극적으로 변한 엘로이즈와 달리, 주인공 마리안느는 처음부터 회피적이었다. 마치 자칫 사랑에 빠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서야, 자신 안의 사랑을 인정하고 나서야, 겨우 아가씨의 영혼의 향기가 깃든 초상화가 완성된다.
결혼식 예복을 입은 연인을 포옹하고 떠나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아니, 아가씨의 요구는 잔혹하다. 뒤를 돌아봐. 나를 봐. 당신은 마지막에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처럼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살아.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갤러리에서 발견한 초상화 속 엘로이즈는 아름다운 아들과 함께 행복해보이는 영혼 없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손에는 둘의 사랑의 징표인 책 28페이지가 보이게 들고 있다.(이것을 귀족 남편의 요구로 그렸을 초상화가는 귀족 부인의 별난 요구라고 생각했겠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니 장황해졌는데 잊어도 될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라서 그렇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정말이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불시착 보다 훨씬 가슴이 벅찼다. 2020 최고의 영화.


불초상을 보며 생각난 영화들.

피아노(1993) 여성 감독 영화. 일본 제목:ピアノレッスン
페어웰, 마이 퀸(2013) 일본 제목: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に別れをつげて

(사진은 IMDB에서 가져옴)
-피아노: 피아노를 치는 것 외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 주인공. 영국의 그럭저럭 사는 집 딸이었으나 혼전 임신 때문에 식민지인 뉴질랜드의 성불능자 남편에게 신부로 팔려간다. 아름다운 테마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의 제목이 주제를 관통하는 것처럼 여성의 욕망에 관한 영화.
-페어웰, 마이 퀸: 40대인 마리 앙트와네트를 짝사랑하는 책 읽어주는 시녀(레아 세두). 하지만 앙트와네트에게는 이미 폴리냑 백작부인이라는 오랜 연인이 있는데... 가슴 아리는 첫사랑, 소녀의 성장 서사.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는 내 오랜 취미였고 한 때는 주요 생업이기도 했다.
어느 날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그후로 꽤 오랫동안 글을 거의 안 쓰고 살았다. 그러고도 그냥 살아졌다. 지금도 어찌 어찌 살아질 것 같다.

게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여름 이벤트가 지나가고 1주년이 찾아오고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오고 신년 이벤트가 또 오고 금방 또 분기가 지나가고 평가 면담이니 피드백 면담이니 하는 인사평가 시기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았다. 입버릇처럼 영어 공부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연휴가 찾아 올 때마다 콘마리의 인생이 두근거리는 방정리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행을 하지는 못 하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결코 읽지 않으면서.

인생 처음으로 아이패드를 구매하여 유용하게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표면적인 계기이다. 근원적으로는 팬데믹-재택 근무 기간에 찾아온 체력 저하와 건강 악화가 있다.
유전의 축복인지 환경의 축복인지 살면서 공부 머리 일 머리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지병(이라기에는 진짜 투병하시는 분들에 비해 아주 사소하지만)을 얻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으로 내 삶을 강제로 너프시켰다.

체력이 달려 일을 예전과 같은 속도와 공수로 소화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육체적인 한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체력은 조금씩 떨어지니까. 다시 꾸준히 관리하면 조금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순진하게도 나는, 사람의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니 좋은 기억들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았다. 어디 어린 시절 뿐인가. 불과 최근 몇 년 사이의 일들조차, 뛸듯이 기뻤던 일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그저 희미할 뿐이다. (쓰고 보니 늙은 작가가 마지막 작품 후기에 쓸 것 같은 문구라서 스스로 잠깐 자아비판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글쓰기 100프로젝트는 매일 쓰고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 끝까지 쓰여진 문장을 굳이 지우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 것은 언제던가? 희열에 가슴이 벅찼던 적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적은?

바꿔 말하자면 지금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인생이 희미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썼지만 겨울철 안경에 김서림 방지제를 뿌리는 것과 본질은 비슷하다.
인생의 김서림 방지를 위해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안경의 김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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